시작 -> 헌신 -> 성령 -> 확신
- peters50119
- 2022년 5월 21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5월 22일
2022.05.22 주일설교 _ 송기석 목사
길갈은 시작하는 장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고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하느니라(수5:9). 길갈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인 사람의 출발점을 나타내며 이곳은 우리가 구원받은 지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주었던 지점이지만 이 지점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길갈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그리스도인이 머무는 장소를 상징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백성들이 길갈로 가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삼상11:14-15). 길갈에 있으면 우리는 영 대신 육신을 선택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더 멀리 전진해야만 합니다. 벧엘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벧엘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아브람이 장막을 치고 주님께 단을 쌓았던 곳(창 13:1-4)으로 맹세의 장소이자 헌신의 장소입니다. 벧엘은 우리가 “주님, 내 삶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단을 세우는 장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벧엘에 도착하셨나요? 아브라함도, 야곱도 벧엘에서 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불렀고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12-22).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것의 십분의 일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점에 도착해야합니다. 우리는 벧엘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할 일은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이 없는데 어떻게 나는 왕궁에 거주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리겠습니다(대상 17:1).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벧엘에서만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벧엘에서 나와 계속 전진해야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벧엘에 머물러 있으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곳이 있습니다. 가야할 여리고가 있습니다.
여리고는 우리가 성령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는데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수 5:13-15). 여호수아는 눈이 열려서 자신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묘사된 성령님을 대면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벧엘에서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성령님을 만나고 그분을 통해 점령하고 소유해야할 여리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뜨려야할 성벽이 있습니다. 여리고는 성령님의 전략을 취하는 곳으로, 그 전략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곳입니다. 여리고에서 성령님을 만나면 그분이 여호수아를 변화시켰듯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김밥을 하나 나눠주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9:14). 여리고에서 받은 또 하나의 계시는 찬양과 침묵의 능력으로 우리는 언제 침묵해야하고 언제가 찬양해야할지를 압니다. 여리고에서 우리의 삶에는 아주 독특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성령님의 전략을 갖게 되는 때입니다. 성령님과 함께할 때 어떤 장벽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꾸준한 예배참석과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전투적인 사람과 전투에서 항상 이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서의 위치에서 기도합니다. 이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입에서는 믿음으로 충만한 능력의 말들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자입니다. 우리의 삶에 성령의 불이 붙도록 여리고로 전진하십시오.
요단은 확신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한다(마 3:17).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자신을 확증하는 삶의 지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될 때 그분께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때 가치 있는 삶, 바른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요단은 육신은 죽고 영이 주장하는 곳입니다. 엘리야와 에녹과 같이 우리도 승천하는 능력을 소유하였으며, 성령의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우리는 감각을 초월하여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연의 영역에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요단의 삶은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합니다(요 15:19). 다른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과 은혜에 따라 하신 것이니, 이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딤후 1:9-10).
하나님께서는 이 삶을 드러내셔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새로운 종류의 사람이라고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벧전 2:9). 이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길갈에서 머물지 말고 벧엘로, 벧엘에서 머물지 말고 여리고로, 여리고에도 머물지 말고 요단으로 나아가십시오. 신약성경을 통해 요단이야말로 우리가 기름부음 받는 곳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상속자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훈련과정을 일컫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어떻게 영적으로 양육되어지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 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엡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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