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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8월 23일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24일

2026.08.23 / 송기석목사 / 새로운 피조물의 리얼 라이프 모델! 재정적 자유! 신약교회 개척!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 십 년, 귀향 십 년, 도합 이십 년의 여정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새로운 왕국도, 더 많은 부와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 하나였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세상 끝까지 가서야,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이 이미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그 가치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보지 못하는 눈

우리는 없는 것을 얻어야 행복해진다고 믿고 끊임없이 바깥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모세는 풍족한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합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 14). 위험은 결핍이 아니라 풍족함 속에서 찾아옵니다. 바울은 반대편에서 같은 진리에 이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자족은 성취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입니다.

떠나지 않았어도 놓칠 수 있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떠났던 오디세우스와 같지 않습니다. 이타카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의 큰아들은 한 번도 집을 떠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의 가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멀리 떠나야만 잃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타카, 그리고 두 가지 함정

교회, 성도, 목자, 셀 가족, 가정 — 이것이 우리의 이타카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당연함이 됩니다. 그러다 삶에 문제가 생기면 시선은 밖을 향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기만입니다.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 몰랐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책임이 시작됩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소중함을 깨달으면 잃을까 두려워지지만,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 소중히 여기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서로 짐을 지는 자리, 잃기 전에 보는 지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25). 교회는 서로 돌아보는 관계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 지혜는 잃은 뒤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있을 때 알아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 나중이 아니라 오늘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향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길 위에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미 작은 이타카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은 더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깨닫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진정한 귀향은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자리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새로운 이타카를 찾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이타카를 알아보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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